수자리 수(戍)자와 개술(戌)자

  한산도의 수루(戍樓)는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이 왜적의 동태를 살피고 전쟁 업무를 보았던 곳이다. 때로는 여기서 휴식하며 사색하고 시를 짓기도 했다. 수루란 본래 변방에 세운 누대라는 뜻이고 ‘수(戍)’자는 변방수비의 의미로 수자리라고 한다. 그런데 이 ‘수(戍)’자는 얼핏 보면 ‘개술(戌)’자와도 비슷하여 일반인들이 간혹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최근에 제승당관리소(김상영 소장)에서 문화재위원회의 승인을 받아 이순신의 친필 글씨를 집자하여 수루 현판을 교체하기로 하였다. 이는 그 당시 해상 전략기지였던 한산도에 이순신의 정신이 담긴 글씨로 유적의 명칭을 상징화하는 것으로써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후대에 귀감이 되는 역사적 상징물이 이순신의 위업을 길이 빛내줄 것이다.

   이순신의 친필글씨를 찾아 조합하는 집자(集字)작업은 필자가 맡았다. 이에 《난중일기》전편에서 가장 알아보기 쉬운 ‘수자리 수(戍)’자와 ‘다락 루(樓)’자를 찾아내었다. 특히 ‘수’자는《임진일기》하단 17장(右의 2행, 上의 15행)의 “수자리(변방)를 지키기에 적합하지 않으니, 그 형세야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不合防戍, 勢不得已]”라는 구절에서 글자를 뽑았다. 이 문장이 난해한 초서로 작성되었지만 전후 문맥과 의미, 자형을 볼 때 ‘수자리 수’자가 분명하다. 더욱이 친필글씨라는 점에서 역사적인 현장감을 느끼게 된다.

   다만 한 가지 아쉬움이 남는다. 한자를 잘 모르는 어린 학생과 일반인들도 알 수 있는 쉬운 정자글씨였다면 더 좋았을걸. ‘수자리 수’자는 가운데에 ‘점주(丶)’자가 들어 있고 ‘개술’자에는 가운데에 ‘한 일(一)’자가 들어 있다. 초서에는 정자와 달리 쉽게 구분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이 두 글자가 서로 비슷하게 작성되거나 서로 구분하기 어려울 때는 오직 전후의 문맥을 고려하여 판단해야 한다. 그래서 문맥으로 해석하는 게 8이고 글씨로 해석하는 게 2라는 “문팔초이(文八草二)”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예컨대 《난중일기》를 보면 ‘무술일기(戊戌日記)’ 표지에 적힌 ‘개술’(戌)자가 ‘수자리 수’자 형태로 써져 있다. 가운데에 점주가 들어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결코 잘못 쓴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면 이렇게 써도 문맥상 무술로 읽혀지기 때문이다. 다른 예로, ‘어지러울 란(亂)’자와 ‘형상 형(形)’자는 서로 다른 글자이지만, 초서에서는 서로 흡사한 경우가 있다. 여기에 바람풍(風)자가 앞에 붙는다면, 풍형(風形)은 잘못된 것이니 풍란(風亂)으로 읽어야 바른 해석이 될 것이다. 이처럼 한문은 한 글자만 봐서는 안 되고 전후의 문맥과 글자들의 위치를 따라 해석해야 한다. 이러한 방법은 지금까지도 널리 통용되고 있기에 조금만 관심을 갖는다면 글자에 대한 오해는 없을 것이다.

   4백여 년 전의 역사의 뒤안길에서 우리는 이순신의 발자취를 따라 그의 숭고한 정신을 배우고자 한다. 오랜 풍상(風霜)의 시련에도 그의 정신이 담긴 유적에는 그의 백절불굴한 기상이 담겨있다. 더욱이 수루에서 느끼는 그의 남다른 우국충정은 절로 옷깃을 여미게 한다. 이제 수루현판의 친필 글씨가 웅혼(雄渾)함을 드러내어 한산도의 중요한 역사성을 말해 줄 것이다. 그 속에서 우리는 남다른 창조정신을 배워 밝은 미래를 열어나가야 한다.

   글 : 노승석 이순신 연구가(교감완역 난중일기, 이순신의 승리비결 저자)

김수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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